한 마을의 구석진 곳에 있는 산속, 집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사이좋은 모녀가 살았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해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항상 양보하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사치라는 듯이 딸에게는 특이한 지병이 있었는데, 가난
때문에 건강이 안 좋기 때문인지 배고픔에 지친 것인지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드는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생활은 궁핍해지고, 딸의 지병은 깊어졌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따뜻해졌기에 잘 버텨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들처럼 두 모녀는 올해도 배고프지만 따뜻한 겨울을 보낼 줄로만 알았습니다.
특이하게 어머니는 웬만한 사냥꾼들보다 활을 잘 다루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은 겨울에도 동물을 사냥해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딸도 그런 어머니를 닮아 활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지병도 있었기 때문에 주로 집안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소처럼 산에 나가려던 준비를 하던 중 딸이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은
같이 있으면 안 돼? 혼자 있기 싫어…"
딸은 평소와 달리 어머니가 힘들어 할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습니다.
"우리 딸! 미안해, 엄마가 금방 갔다 올게. 갔다 와서 맛있는 고기 먹자."
어머니는 공허한 말을 남기면서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애써 웃으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딱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무시했습니다. 어머니는 추운 산속을 한참을 헤매다 운이 좋게도 토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운이 조금만 더 좋다면, 시장에서 잡다한
식물들의 뿌리 같은 것들과 바꿔서 자신과 딸 모두 이틀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처럼 시장에 가려던 차에, 집을 나오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런 그녀의
뒤로 어느새 하얀 발자국들이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어머니는 큰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평소 같으면 이름을
부른 순간 해맑게 달려 나왔을 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불안감이
떠올랐고 이어서 새로 온 영주에 대한 소문이 생각났습니다. 워낙 사람이 없는 산골짜기에 살았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최근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들었던 부정적인 소문들이 머릿속으로 홍수처럼 몰려왔습니다.
특히, 악마와 계약하여 자신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거리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납치해간다는 소문을.
어머니가 산으로 음식을 구하러 나간 후 딸은 마음을 다잡고, 집안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좀 더 편히 쉬길 바라는 한편, 온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좀처럼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고, 이상함을 느끼던 중 수상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일찍 돌아오셨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라면 벌써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셨을 것이기에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불안감을 크게 느낀 딸은
몰래 뒷문으로 나가 평소 어머니가 항상 들르시던 시장으로 달렸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딸은 길가의 골목 구석에서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딸이 처음 본 것은 쇠창살과 자신의 손목을 휘감은 무거운 수갑이었고, 지하실 특유의 차고 눅눅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 도착한 후, 불안감에 휩싸인 채 집안을 뒤지다가 뒷문에서 눈밭 위로 새겨진 작은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이윽고 딸이 시장으로 갔음을 알게 되었고, 다급하게 뒤쫓아 갔습니다.
시장에 도착한 후 미친 사람처럼 딸을 찾았지만, 딸은 이미 시장에서
사라진 후였습니다. 시장에 있는 사람들과 상인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물어본 결과 영주의 병사들이 어떤
잠든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짧은 시간 뒤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또다시 몰려오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부정하면서 발걸음을 영주의 성으로 옮겼습니다.
영주의 성에 잠입한 어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영주의 지하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굴 같은 거친 벽면에 걸린 횃불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지하실
중앙의 제단으로 보이는 석조물 위에 자신의 딸이 묶여 있었으며, 모자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입은 사람들이
얼굴이 안 보이도록 모자를 눌러 쓴 채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영주에 대한 소문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잘못된 욕심 때문에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려는 영주를 보자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분노에 휩싸인 채 소리를 지르며 영주를 공격하려 했지만,
영주는 즉시 딸을 인질로 삼으며 말했습니다.
"무기를 버린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항복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모두 죽이고, 새로운 녀석들을 구하면 그만이다.”
어머니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뭇거린 찰나의 순간, 검은 망토를 입은 사람들과 영주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병사들이 들이닥친 순간 어머니는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혼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보였지만, 전투가 길어지자 마법사들이 지하실 자체를 폭파하려는 듯이 공격을
했고, 결국, 어머니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쓰러졌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며 지하실도 무너지기 시작했고, 영주와 살아있는 병사들은
다급하게 지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지하실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딸의 곁으로 갔으며, 딸은 묶인 채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아,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딸은 무엇이 미안한지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 때문인지, 지병 때문인지 딸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안간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눈을 완전히 감은 순간 딸은 평소와 무언가 다름을 느꼈습니다. 어둠이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낯선 음성이 들렸는데 생에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임에도 익숙함이 느껴졌습니다.
목소리는 말했습니다.
“세상에 개입해선 안 됨을 알면서도, 내 업으로 인해 너희가 평생을
고통받고 그 끝마저 좋지 못했으니, 또 다른 업을 만드는 것임을 앎에도 새로운 생명을 주려 한다.”
“하지만 둘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음성을 들은 딸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딸의 어린 생각으로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인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눈물에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딸이 살기를 바랍니다.”
딸도 어머니처럼 자신보다는 어머니가 살기를 바랐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는 사이 말할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딸을 보며 말했습니다.
“딸아,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단다.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구나, 앞으로는 여기서라도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으마.”
그렇게 딸은 완전히 어둠 속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전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우선 등 뒤로 날개가 느껴졌고, 팔과 다리도 이전보다 길어진 것 같았습니다. 또한, 무언가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나와서 확인해보니 거대한 백합의 봉오리였습니다.
눈을 뜨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또다시 지겨운 잠이 몰려왔습니다. 딸은 잠을 원망하면서도 꿈속에서라면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잠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잠이 든 후 꿈속에서 딸은 자신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기운이 자신의 주위를 항상 맴돌고 있었고, 그 기운을 이용하여 주위 생물의 수면과 꿈을 제어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평소에 원하지 않음에도 쉽게 잠들었던 이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 기운이 항상
주위를 맴돌았는데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힘을 깨달은 후 딸은 영주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우선 가장
익숙한 무기인 활을 들고 영주를 찾아갔습니다.
그 이후 복수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활과 잠에 빠트리는 능력으로 손쉽게
병사들을 제압했고, 영주와 그 일에 가담한 이들에게 영원히 잠을 자면서 악몽을 꾸게 하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복수를 이룬 후에는 붙잡혔던 모든 사람을 풀어주었고, 다시 자신과
어머니가 살았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딸은 자신도 살아났으니 어머니도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에게 생명을
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차원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딸은 차원을 건넌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어머니의
활에 자신의 힘을 부여해 새로운 활을 만들었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한 손에 꼭
쥔 채로 차원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넘어간 순간, 이상한
머리를 한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용병 | [릴리] 릴리 데미지 정리표, 팁, 버그[2] | 준장설연하 | 2020-08-26 | 6 | 7601 |